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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커피샵의 ㅊㅈ이야기2020-07-19 02:04
카테고리이야기 > 드라마
작성자 Level 10


 


서투른 첫사랑을 끝낸 자게이는 방황을 합니다.


덕분에 1학년 2학기 성적은 1.75라는 장렬한 스코어로 마무리됩니다.


(성적표를 발견하신 부모님께 제 인생도 마무리될뻔 했습니다)






겨울방학엔 계절학기도 안 듣고 알바도 안 하고


잉여중의 상 잉여가 됩니다.


Toy 1집 듣고 질질 짜고,


2집 듣고 질질 짜고,


3집 듣고 질질 짜고,


4집 듣고 질질 짜는 생활이 반복됩니다.


정신을 차리면 리니지2 렙업을 충실히 합니다.


....뭐지;;;;






암튼 그렇게 잉여로운 나날이 계속되던 중에


PC방-편의점-원룸 루트 사이에 무언가가 생깁니다.


바로 당시 유행을 막 시작하던 커피 전문점입니다.


뚝딱뚝딱 공사를 하더니 순식간에 K모 커피전문점이 생깁니다.


...당시엔 제가 살던 동네에 브랜드 커피샵이라고는 스타벅스 한군데 있을 뿐일 때입니다.


것도 학교에서 한 30분 나가야....ㅎㄷㄷ





공사가 끝나고 커피 볶는 향이 거리에 퍼져나갑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로스팅을 제대로 하는 것 같지도 않았었고


무언가 좀 타버린 원두 맛이 나는 게 별로였던 기억도 나긴 하는데


암튼 그때는 일약 센세이션이었습니다.


점심때만 되면 테이크아웃 커피를 사가려는 사람이 줄을 섰지요.





그 커피전문점을 지나던 어느 날,


무심코 고개를 돌린 자게이는


마침 테이크아웃 카운터로 고개를 살짝 내민


커피샵 ㅊㅈ를 처음으로 보게 됩니다.




끝을 살짝 둥글린 짙은 갈색의 단아한 단발머리,


분명 립스틱을 바른 것 같지 않은데 핑크빛으로 빛나는 입술,


하얀 얼굴에 선한 이목구비,


컵을 건네는 가늘고 긴 손가락.




분명 ㅊㅈ를 바라본 시간은 채 몇 초가 되지 않았겠지만


그 모습과 이미지가 뇌리에 박혀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커피라곤 당시 150원하던 자판기 커피나 맥심 커피믹스밖에 모르던 자게이가


분수에 맞지 않게 앉은 자리에서 에스프레소 석 잔을 마시고 나오는 생활을 시작합니다.












잠깐 커피 한잔 내려 올게요...











아무튼 그래서 겨울방학 내내


학과실-커피샵-PC방-편의점-원룸 무한루프를 타는


좀 더 잉여로워진 생활을 계속하게 됩니다.





글 쓰면서 생각하니


그때 그 ㅊㅈ는 제가 미친놈처럼 보였을거라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집니다ㅠㅠ


웬놈이 매일매일 에스프레소 석잔을 물마시듯이 벌컥벌컥 마시고 나가니;;;





아무튼, 겨울방학이 지나 2학년이 시작된지 며칠 지났을 무렵


강의실을 찾아 걸어가다가


음대 2층 연습실 창문 너머로


그 ㅊㅈ를 발견합니다.





ㅊㅈ는 플루트 전공이었나 봅니다.


어쩐지 손가락이 너무 예뻤습니다ㅠㅠ





음대와 커피샵 사이의 이동경로를 파악합니다.


그리고 매일 마주치기를 시도합니다.


이번에는 섣불리 아는체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그 ㅊㅈ 쪽에서 먼저


가볍게 목례를 해 옵니다.


저도 무언가 쑥스러운 척을 하며 답인사를 합니다.


하루에 마주치는 것은 많아야 두세번,


학교에서 한두번, 커피샵에서 한번.





일부러 커피샵이 있는 골목길을


왔다갔다 합니다.


악기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으면


좀더 관심을 가져줄까 해서


바이올린 '케이스'만 들고 다니기도 여러번이었습니다.





학교 축제날이었습니다.


그룹사운드, 초대가수 공연 소리로 시끌시끌한 학교를 나와


예의 커피샵으로 향했습니다.


매일 함께 일을 하시던 점장이 없습니다.





'플룻 연주하시는 거 봤어요'


제 입으로 채 의도하지 않았던 말이 툭 튀어나옵니다.


ㅊㅈ의 얼굴이 바알갛게 물드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왕 미친김에 한마디 덧붙입니다.


'언제 한번 들려주세요'







플룻 연주곡 하나 걸고 옵니다......










ㅊㅈ의 얼굴이 더 붉게 물듭니다.


오늘 자게이 필받았습니다. 연이어 말을 건넵니다.


'학생이신데, 축제 안보세요?'


'아르바이트가 9시까지여서요.'






목소리가, 목소리가....


너무 이뻤습니다.


어리고 고운, 적절한 하이톤의 목소리였습니다.


짧은 말 한 마디였는데, 마치 노래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자게이는 용기를 냅니다.


자게이 틈틈이 과감한 면이 있습니다ㅋㅋ





'아르바이트 끝나면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갈까요?'


ㅠㅠ


이게 웬 유치한 멘트인가 하고 좌절합니다.


ㅊㅈ는 살짝 웃더니 끝나고 청소랑 마감해야 해서 열시 넘어서 끝난답니다.


자게이는 꼬리를 내립니다.


마침 일손이 부족하다고 빨리 와서 잔디 뜯어서 전 부치라는


동기 여학생의 전화를 받고 도망치듯 빠져나옵니다.





그나저나 학교 축제는 재밌습니다.


열한시쯤 되었나, 손님들이 한번 왔다가 빠지고


잠시 한산한 틈에 주점 입구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신입생이


누가 저를 찾는다며 호기심 발동한 눈으로 천막 안팎을 봅니다.






'불꽃놀이 안 끝났죠?'





금방 끝나는데 얼른 쓰고 갈까요?




하필이면 방금 마신 동동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무지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과 여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을 등뒤로 느끼며 자게이는 ㅊㅈ를 에스코트합니다.





...불꽃놀이는 언제 어디서 하는지도 모르는데ㅠㅠ


등뒤로 식은땀이 마구 흐릅니다.


ㅊㅈ도 막상 오긴 했는데 좀 쑥스러운가 봅니다.




'막걸리 드실래요?'


아 진짜 오늘 자게이 미쳤나봅니다.


주둥이를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야....ㅎㄷㄷㄷ




그런데....


ㅊㅈ가 오케이를 때립니다.


가장 가까운 주점은 법대 주점입니다.


여기는 학교에서 나름 높은 지대에 있는데다


앞쪽으로 정원 비슷한 것이 있어서 분위기가 꽤 좋습니다.





막걸리 냄새가 진동하는,


아무 상관없는 단대 주점에


처음 만나는(처음은 아니지만 암튼 밖에서는 처음) ㅊㅈ와


단둘이 막걸리를 마시자니 어색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ㅠㅠ





잠자코 있던 ㅊㅈ가 입을 엽니다.


실은 제가 한 일주일쯤 계속 왔을때부터


슬슬 눈치를 챘다구요.


민망해진 자게이는 막걸리를 들이킵니다.





일부러 말을 안하려고 했는데


제가 전혀 아무 별 말이 없어서


그래도 긴가민가 했는데


오늘 말 건네는 것을 보고 확신을 했다며


빙그레 웃습니다.





웃는 모습을 보니 더욱 숨이 막힙니다ㅠㅠ


조명도 뭐도 없는 어둑어둑한 잔디밭인데


너무 예뻐 보입니다.


ㅊㅈ는 말을 이어갑니다.





이번 학년을 마치고 유학을 간답니다.


4학년 1학기가 되었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도 누군가와 함께


축제를 보러 다닌 적이 없더랍니다.


매일 알바에, 연습에, 레슨에...


불확실한 장래와, 이루기 힘든 꿈과


다른 잘 사는 친구들과 비교되는,


다른 재능있는 친구들과 비교되는 그저 평범하기만 한 스스로가 힘들었답니다.






문득 ㅊㅈ의 얼굴을 보니


어느새 얼굴이 빨개져 있습니다.


술을 많이 못 하는 ㅊㅈ인가 봅니다.


술기운을 가실 겸 같이 걷자고 합니다.


살짝 비틀거리는 ㅊㅈ의 어깨를 자연스레 잡습니다.


굳이 손을 뿌리치지는 않더군요.


시간은 어느 새 버스가 끊길 때였습니다.






죄송해유 상하로 끝낼려고 했는데;;;







ㅊㅈ의 집은 학교에서 걸어서 꽤 걸리는 거리입니다.


가로등이 켜진 조용한 거리를


둘이서 한참을 걸었습니다.





골목을 돌아 작은 공원이 나옵니다.


문득 멈춰 선 ㅊㅈ가 플룻 케이스를 엽니다.






G 선상의 아리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곡은 끝났지만 여운이 골목을 타고 계속 흐르는 것 같습니다.







연주를 마치고 플룻을 분리해 넣는 ㅊㅈ의 이마에


저도 모르게 키스를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후 어쩐지 손을 잡고 마저 집 앞까지 바래다 줬던 것도 아련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도 저는 매일 에스프레소 석 잔을 마시러 커피샵으로 갔고


ㅊㅈ는 항상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주었습니다.





몇 번을 더 밖에서 만나


없는 용돈을 쪼개서 파스타도 먹고


무리해서 스테이크도 한번인가 먹었나 기억이 납니다.





ㅊㅈ는 결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저는 끝내 ㅊㅈ를 잡지는 못했습니다.


ㅊㅈ의 꿈이 유학을 떠나 좋은 연주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제 힘으로 그 뒷바라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비겁하고 나약한 걱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몇 년 후 저는


종로 어딘가를 걷다가 문득


'OOO 귀국 독주회' 포스터에서


여전히 조용하고 아름답게 웃고 있는 ㅊㅈ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원래 독주회는 초대권 막 뿌리잖아요.


하지만 저는 굳이 표를 한 장 사서


절대 눈에 띄지 않을, 금호아트홀 한쪽 구석에 앉아서


그녀의 플룻 연주를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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